• 소통 - 비익조, 연리지, 송라의 하나된 사랑
    165 202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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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끊어지지 않는 사랑: 비익조, 연리지, 송라

     

    "야곱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는 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 곳의 한 돌을 가져다가 베개로 삼고 거기 누워 자더니 에 본즉 사닥다리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28:10-12). 야곱이 형 에서의 살해 위협을 피해 고향 브엘세바를 떠나 외가가 있는 하란을 향해 가다가 하룻밤 노숙하던 중 꿈에 하나님을 만났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28:16-19). 야곱은 꿈에서 하나님의 함께하심, 번성하게 하심, 인도하심에 관한 약속을 받고서 잠에서 깼다.

     

    이제 야곱의 인식이 이전과 아주 달라졌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 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로다.' 하나님이 지금 여기 야곱과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야곱은 그 곳을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라고 명명했다. 크고 놀라운 깨달음이다. 그러나 야곱의 깨달음은 더 확장돼야 할 것이다. 그 때뿐만 아니라 언제든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하시며 거기뿐만 아니라 어디든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하시는 벧엘이다.

     

    오랜 후 다시 만날 때까지 거기 벧엘에 머물러 야곱의 귀환을 기다리실 하나님이 아니셨다.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하란으로 이동하셨다. 아니, 언제 어디서든 야곱은 하나님 안에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한 특정 시공간을 특별히 기억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 안에 있다. "내가 주의 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139:7-8).

     

    언제 어디서든 우리는 주님 안에 있다. 더 나아가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신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주님과 우리는 하나다. 눈과 날개가 각기 한 개뿐이어서 둘이 하나일 수밖에 없는 비익조(比翼鳥)처럼, 두 가지가 서로 접속돼 한 가지로 공유할 수밖에 없는 연리지(連理)처럼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불가분리다. 이 사실을 우리가 평소에 모른 채, 잊은 채 살다가 문득 야곱처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깨닫든, 못 깨닫든 주님과 우리는 여하튼 연결돼 있다. 소나무겨우살이 '송라'(松羅)가 있다. 송라는 고산지대의 소나무에 매달려 실타래처럼 자란다. 스스로 살 수 없어 소나무에 붙어사는 것이다. 아무 소나무에나 붙어살지는 않고 고산지대의 소나무 가지에 붙어산다. 산 가지가 아니라 소나무의 죽은 가지에 붙어산다. 우리가 예수님께 의지해 살되 예수님의 죽음의 십자가에 의지해 살듯이 송라도 소나무에 의지해 살되 소나무의 죽은 가지에 의지해 사는 것이다.

     

    송라는 약효가 뛰어나다. 산삼을 능가하는 수준이다. 여러 암에도 효과가 좋다고 한다. 송라는 심마니들의 표적이지만 워낙 험산준령에서 겨우 발견되기에 채취가 어렵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음의 십자가에 의지해 산다면, 소나무의 죽은 가지에 의지해 사는 송라의 약효가 뛰어나듯이 우리의 빛과 소금의 약효도 뛰어날 것이다. 송라는 고산지대에 있는 소나무의 죽은 가지를 의지해 살며 땅의 지배에서 자유롭다. 우리도 예수님의 죽음의 십자가를 의지해 살면 땅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비익조와 연리지는 각기 둘인데 하나와 같다. 한쪽이 죽으면 다른 쪽도 죽게 된다. 예수님이 죽음의 십자가 못 박히셨으니 우리도 죽음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2). 세상의 악은 사람의 탐욕과 집착을 먹고 자란다. 우리의 탐욕과 집착이 죽음의 십자가에 못 박히면 세상의 악도 그만큼 쪼그라들 것이다. 송라가 소나무의 죽은 가지에 의지해 살 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죽음의 십자가에 의지해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는단 말입니까? 고난입니까? 의로움입니까? 핍박입니까? 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현대인의성경 롬8:15). 그 누구도 예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죽음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지옥의 권세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은 것이나 깊은 것이나 그 밖에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현대인의성경 롬8:38-39). 그 무엇도 예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

     

    "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1:4-5). 우리는 창세 전에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되고 선택됐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1:15). 사도 바울은 모태에서부터 자신을 하나님이 선택하셨다고 밝힌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15:16).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 같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선택하셨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 주님의 은혜가 먼저 있었고 그 은혜에 의해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된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15:5).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거기에 붙어 있는 가지다. 주님과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연결돼 있다. 주님과 우리는 비익조처럼, 연리지처럼, 소나무-송라처럼 끊어지지 않는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안주해서는 안 된다. 서로 연결된 하나를 굳건히 지키려고 힘써야 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2-14). 사도 바울은 주님께 붙잡혔지만 그 붙잡힌 것을 붙잡으려고 경주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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